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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의 원동력 : 도올 김용옥의 도마복음 이야기에 대한 단상

      • 너무싫다
      • 2025.07.09 - 00:13

     

    도마복음에 대한 도올의 글

    ​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중앙일보의 일요판 중앙선데이에 연재된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2008년 11월 26일자 글, “구원을 얻었다 하자!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어둠과 빛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지상의 어둠과 이원론적으로 대비되는 구원의 빛을 얻었을 때, 빛뿐인 세계에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면서 도마를 인용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간이 어둠의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그 사실에 대하여 대비적으로 ‘빛’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공갈이나 협박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빛을 보라! 어둠의 동굴 속에선 물론 빛 한 줄기만으로도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세상 속에서 산다. 그때 빛이란 너무도 흔한 것이다. 영생을 얻으리라. 생명을 얻으리라는 것은 일종의 클리쉐(cliché : 진부한 문구)에 불과하다. 도마의 문제의식은 ‘빛을 발견하리라’ ‘빛을 얻으리라’가 아니다. ‘빛 속에 네가 일상적으로 거하게 되었을 때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 정말 충격적인 말이다. 도마의 비판은 동일한 문명권의 한 사유체계인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만을 강조하고, 거기에 대한 반사적 효과로서 멸집(滅執)의 해탈을 운운하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기만이나 협박일 수 있다.

     

    도마에 의존한 김용옥의 논지는 인간이 구원 받아 어둠이 없는 빛의 세계, 곧 불행이 없는 세계에서만 산다면 그 지겹고 권태로운 삶을 어떻게 하자는 거냐?,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둠으로 치부된 현실과 대립된 그런 세계가 구원의 세계라면 그런 것은 필요 없으며 그것을 위해 설교하는 것은 ‘공갈’이고 ‘협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는 잠시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덧없는 행복한 면면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지불해야 할 불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또 인간 자신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상관적 체험 관계 속에서 살아야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비극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육성 도마복음

    저자
    도올(김용옥)
    출판
    통나무
    발매
    2025.06.13.

    기독교 : 이원론의 견지

    ​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이런 관계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과거의 이승의 삶을 전제로 해서 가기 때문에 이승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가는 것이죠. 따라서 이 기억에 따라 이 지상에서 겪었던 고난과 불행의 환기가 낙원의 새로운 삶을 음지에서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이런 논리는 서구인들이 현재의 풍요로운 낙원 같은 삶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과거의 아픔과 고통, 특히 1,2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환기하면서 서양에서 그 어떤 명분이든 전쟁만은 안 된다고 경계하는 이치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역사와 기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기억은 천국의 행복을 참다운 행복으로 인식하고 느끼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불가결한 장치인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성서의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과 대비되는 지옥이 설정되고 있다는 점은, 구원의 영원한 빛 속에서 살면서도 지옥의 어둠을 바라보면서 창조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부자라는 점을 확인하고 의미와 방향을 창출해나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심판이 끝나도 생성계 내에서 선/악의 관계를 통한 놀이가 계속된다는 데 기독교의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저지른 죄의 대가로 지옥의 영벌을 받은 자들이 있기에 천국에서 지복을 누리는 자들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만 있다면 천국 자체의 의미가 소멸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볼 때, 빛만 있는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

    구마라습 동상, 신장 키질 석굴 앞

    두 종류의 구원

    ​

    다른 한편으로 불교의 주장, 곧 ‘일체개고만을 강조하면서’ 멸집(집착을 끊어버림)을 통해 해탈해야 한다는 것 역시 ‘기만’이나 ‘협박’일 수 있다는 도올의 발상 역시 무언가를 망각한 것 같습니다. 동양 사상 전문가로서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가 민중과 노예의 종교인 기독교와는 반대로 불교가 귀족과 엘리트의 종교라는 사실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싯다르타는 왕자로 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불교의 수많은 경전과 교리의 궁극 목적은 해탈인데, 이 해탈은 기독교의 구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가 빛과 어둠의 이원적 상관관계를 초월하지 않고 생성계 내에 머물고자 한다면, 부파불교 혹은 근본 불교는 생성계 자체를 초월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 절대 상태로 회귀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창세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존재 했을 테니까, 이 절대 상태 역시 무(無)규정적인 하느님을 지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성계 이전의 하느님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게 불교이고, 생성계 내에서 하느님한테 구원받고자 하는 게 기독교인 것이죠. 달리 말하면 기독교는 ‘말씀’의 세계에 머물고자 합니다. 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곧 로고스는 아담과 이브, 선악과, 뱀 등이 엮어내는 관계 구조의 창출입니다. 반면에 불교는 이 관계 구조를 넘어서, 의미를 낳는 패러다임을 넘어서 말씀 이전의 침묵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을 구성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불교도와 기독교도는 싸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생성계 이전의 하느님, 부정신학적(否定神學的)으로 말하면 인간의 제한된 인식으로는 규정이 불가능한 그 초월적 존재로 되돌아가고자 하는데, 왜 야단이냐? 라는 것이죠. 특히 개신교도들은 이 점을 잘 알고 불교도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불식시켜야 할 것입닏다.

    그리스도의 왕국, 샤르트르 대성당

    생성계를 넘어선 열반

    ​

    그렇다면 왜 불교는 생성계 이전의 상태로 가고자 하는가? 일체개고라는 말, 즉 모든 게 고통이라는 표현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의식을 가진 인간의 행복은 불행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행복 속에 이미 불행이 들어와 있습니다. 행복만 있으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행복을 행복으로 만들어주는 게 불행이며, 행복 자체가 불행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도 불행을 전제로 하니 모든 게 고통인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인식론적 놀이를 하기 위해선 누군가 고통 받는 존재가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지옥은 영벌을 받은 중생이 구원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하는 곳임을 상기합시다. 물론 불교는 무량한 자비를 통해 이들 마저도 구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지만 말입니다. 인류의 누군가가 불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숙명, 하느님이 창조한 이후의 이 생성계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이 숙명을 불교의 해탈은 열반을 통해 넘어서고자 합니다. 이 해탈은 생성계의 이원적인 놀이 자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

    엘리트 종교와 민중 종교

    ​

    그것은 지상에서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민중이 소망하기에는 너무도 먼 피안이라 하겠죠.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이 사바세계에서 온갖 영화와 권력과 부를 누린 지배 엘리트 계급만이 욕망의 정상을 정복했기에 그런 해탈을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귀족 종교이며 이 점을 뒷받침하는 게 싯다르타가 왕자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반대로 불교가 못 사는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국민 전체가 일정한 생활수준에 오른 유럽의 잘 사는 나라에 파고들고 있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권력도 싫고, 부(富)도 싫으며, 명예도 싫증 난 상태에서 모든 것이 시시하게 보여 무덤덤해져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진대, 일반 대중과 서민이 어떻게 그게 단번에 가능하겠습니까. 많은 윤회를 거쳐야 도달할 것입니다.

    니르바나 : 공과 무한의 빛

    마음의 두 세계

    ​

    여기서 <누가복음>(17, 20)에서 예수님이 천국은 어디에 있는지 질문을 받고 대답한 것을 잠시 생각해봅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과 접근되어서 자주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흔히 ‘너희 가운데 있다’는 ‘너의 마음속에 있다’로 해석됩니다. 그리하여 천국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원 받은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이 표현이 이해되어 불교의 해탈한 마음(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를 상기합시다)과 나란히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묵시록>을 통한 기독교의 구원은 생성계 내에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면서 나타나고 불교의 구원은 이런 생성계 차원을 넘어서 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 곁으로 간다 해도 그 상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두 구원이 똑같은 마음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타락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을 거쳐 최후의 심판까지 섭리의 역사를 고려할 때, 성경의 구절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즉 천국은 유배지인 이승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은 낙원인바, 신도는 끊임없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서 선(善)을 부지런히 행하면 최후의 심판 이후에 오는 이 낙원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하느님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동일한 하느님이라 할 수 있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을 접근시키는 데는 이처럼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내세 중심적 구원보다 현세 중심적 구원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이나 대승불교를 끌어들이면 문제가 복잡해지니 이 두 경전의 관점은 제외하겠습니다.

    ​

    요컨대 생사의 고통이 엮어내는 의미적 세계에 다시 돌아오지 않고 창조 이전의 하느님 세계에 절대적 휴식 상태로 머무는 것, 그게 바로 궁극적 해탈입니다. “해탈을 해서 무엇 하겠다는 거냐?”와 같은 도올의 질문은 나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불교의 관계론은 별도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

    이상의 내용은 저의 아래 저서 p. 192-198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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