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복음주의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양면성에 대해.
요즘 교회는 출석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후원은 받고 싶은 이들을 일컬어 '진보적 복음주의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양면성에 대해.
다음은 제공된 자료를 바탕으로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정의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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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정의와 모호성:
- 복음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으나, 성경 해석의 범위만으로도 그 스펙트럼이 어마어마하게 넓습니다.
-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예수님의 유일한 중재자 역할, 그리고 폭력·독재·가난 등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정의했습니다.
- 잉글랜드의 신학자이자 사제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성경의 권위 강조, 성경 공부와 묵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구속의 의미 강조, 성령에 의한 회심 강조, 그리고 헌신적인 복음 전파를 복음주의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 한국의 신학자 정성욱 박사는 복음주의를 성경을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말씀으로 믿고,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복음의 말씀으로 믿으며, 비평적인 성경 해석과 관점도 비판적으로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의했습니다.
- 이처럼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믿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을 보입니다.
- 현재 한국 기독교에서 복음주의는 대단히 모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을 지지하는 명확한 진보 진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가 복음주의로 분류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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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음주의의 범위:
- 크게 보면, 현재 한국 기독교에서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 중 보수적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경우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발표한 로잔 언약을 지지하는 것까지를 복음주의자라고 봅니다.
- 로잔 언약을 넘어서는 진보적인 신학과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에큐메니칼 지지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에큐메니칼 지지자들 중에서도 자신들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보수적 복음주의자들 중에서도 로잔 언약을 지지하는 이들이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국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과 모순
- '복음주의의 문제 = 한국교회의 문제':
- 어느 시점부터인가 한국교회의 문제는 곧 복음주의의 문제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복음주의에서 영성이 사라지고, 신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으며, 도덕이 붕괴되고 있다는 지적을 포함합니다.
- 이러한 지적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동의하며, 복음주의의 문제를 지적할 때 '나는 그런 복음주의자는 아니다'라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러나 새로운 교회 운동이나 신학 담론을 위해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모일 때는 스스로 복음주의자를 자처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즉, 손해를 보거나 비난받을 때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가, 이득을 보거나 힘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모호성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같은 양면성으로 비유됩니다.
진보적 복음주의(Progressive Evangeli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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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규정과 배경:
- 스스로를 '진보적 복음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이들은 이러한 복음주의의 모호성을 대표하는 예시입니다.
- 이들은 자신들이 복음주의자이므로 진보 진영인 에큐메니칼 지지자들과는 선을 긋습니다.
- 하지만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특정 세력들과 구분 짓기 위해 '진보적'이라는 이름을 덧붙입니다. 특히 사회적 쟁점에 대해 기존의 복음주의보다 진보적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 신학적 근거:
- 1974년 **로잔 언약의 제5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입장을 근거로 삼습니다. 로잔 언약 제5조는 인종, 종교,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복음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천명합니다.
- 1970년대부터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신학적 근거로 삼습니다.
- 아브라함 카이퍼로부터 시작되어 프란시스 쉐퍼에 의해 발전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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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이라는 이름의 모순과 비판:
- 저자는 스위스 로잔 언약, 하나님 나라 신학,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한국의 진보적 복음주의자를 정의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러한 기반들이 사실상 대한민국 대부분의 교회의 정체성이기도 하다고 지적합니다.
- 대부분의 신학대학교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정규 과정에서 가르치며, 아브라함 카이퍼나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대단히 보수적인 기독교 운동으로 분류됩니다.
- 그렇다면 복음주의 안에서 굳이 '진보적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자는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성향에 문제가 많다고 보아 그에 대해 구분 짓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근본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하면 될 일인데, '진보적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을 제외한 대다수 한국 교회를 근본주의자라고 규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 또한, 에큐메니칼 지지자라고 하면 될 일을 굳이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합니다.
- '87년 복음주의 안녕' 운동:
- 2012년부터 개신교 월간지 '복음과상황'이 시작한 기획으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기독교 사회 참여의 전환점을 이끌었던 손봉호, 이만열 교수님과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이동원 목사님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복음주의 4인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외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저자는 이러한 주장이 공식적인 논의 테이블에 오를 만한 주장이 아니며, 복음주의 4인방을 비판한다고 해서 복음주의가 제대로 설 리 만무하다고 비판합니다.
- 지난 10년간(2012년~2021년) 공식적인 자리에서 복음주의 4인방을 비난하고, 한국의 모든 교회가 이들과 같으며 모두 근본주의자들이라는 말만 반복해 왔다는 지적입니다.
- 이로 인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에 돈과 인력을 제공한 곳이 바로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던 '복음주의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 저자는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격한 대립 속에서 성경의 권위, 종교개혁 정신, 사회적 책임, 지성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짝퉁 복음주의' 운동에 '진보적'이라는 이상한 단어를 붙여 스스로를 규정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자신들이 지난 10년간 교회를 근본주의자 취급하며 '87년 복음주의 안녕'을 외쳐왔기에 스스로 복음주의자라 하기에는 모순이고, 그러나 재정적 지원은 복음주의 교회로부터 나오기에 이러한 '모순적인 구분 짓기'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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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책임 회피와 이기적인 태도:
- 저자는 진보적 복음주의에 대한 이러한 긴 설명이 현재 우리가 교회에 대해 취하는 스탠스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교회를 다니거나 관련 일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시대이다 보니, 겉으로는 교회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나는 저들과 다른 진보적 복음주의자'라고 선을 긋지만, 사실은 '교회는 어떻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 결론적으로 저자는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비판하는 '근본주의자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순수함'이 오히려 교회를 지킬 것이라고 질문하며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