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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교회는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혐오하게 되었을까? | 예수님이 추구했던 ‘안드로포스(온전한 인간)’를 외면한 교회
이 영상은 한국 교회의 성장 과정과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특히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재고할 것을 촉구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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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교회의 모습:
- 한때 한국 교회의 상징이었던 새벽기도는 목회자의 설교보다 개인 기도가 중심이었습니다.
-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이들, 특히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 억눌려 살던 여성들이 눈물 흘리며 위로와 격려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 당시 교회는 신학적이나 물질적으로 화려하지 않았고, 건물이나 설교의 질이 높지 않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어 사람들이 스스로 몰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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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장과 변질:
- 사람과 헌금이 몰려들면서 교회는 건물을 크게 짓고 부동산을 매입하며 성장했습니다. '십자가만 꽂으면 교회는 성장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 사회학자는 당시 교회가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라는 세 단어만 외친다고 평가했습니다.
- 교회는 돈과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형교회는 중요한 마켓플레이스로 여겨졌으며, 연예인이나 권력자, 부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 이러한 성장 속에서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은 명품, 외제차 등 외적인 모습에 신경 쓰게 되고, 교회 모임의 회비 수준도 높아져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은 참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 교회 내에서 돈벌이나 자녀의 성공 같은 세속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힘든 삶을 고백하는 이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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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 지도자들의 이중성 비판:
- 영상은 교회에 다니는 사장이나 부장, 이사 등이 직원들에게 부당하게 대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교회에서는 신실한 모습을 보이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 직원들을 기계 부품처럼 여기면서도 월요일 아침 전체 회의를 사장님의 대표 기도로 시작하는 등의 위선적인 모습을 꼬집습니다.
- 경제적으로 어려워 십일조나 헌금을 내기 힘든 교인들에게 '십일조 떼먹으니 그렇게 산다'고 충고하는 현실을 보여주며, 교회가 가난한 신자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 목회자들이 헌금 안 하는 신자들을 험담하고, 헌금을 많이 낸 장로나 권사들이 교회 내에서 위세를 부리는 모습은 교회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고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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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휴머니즘)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모순:
- 교회는 '인본주의가 타파되어야 신본주의가 바로 선다'고 가르치며 휴머니즘을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몰아세웠습니다.
-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며 은혜받는 모순적인 상황을 언급합니다.
- 이러한 모순은 인간성 소멸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혹은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휴머니즘이 사실은 진정한 신앙의 표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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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중요성과 교회를 향한 질문:
- 영상은 **'상식'**을 인류가 함께 경험하고 공유하는 일반적인 지식이라고 정의하며, 복잡한 신학적 지식 없이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 현재 교회의 고위직 인사들(목사, 장로, 권사 등)의 모습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성경을 빙자해 부와 권력을 채우는 이들인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 현재 교회의 문제가 인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인간성이 상실되어 발생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볼 것을 촉구합니다.
- 돈과 권력에 취해 힘없고 돈 없는 이들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가르침만 내세우는 곳에서 말하는 신본주의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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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설교자와 대표 기도자의 목소리만 들리고 성도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현상, 새벽기도와 기도 소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이유가 인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인간성 상실'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 교리, 신학, 성경이 개인의 이익과 주장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신본주의'에는 더 이상 속아 넘어가는 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 인간은 나약하고 이기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삼는 파렴치한 모습에 통곡하며 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김완용 시인의 '울 곳'이라는 시를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